근래 사진(일부공개)/세상이야기

펌- 중국 혐한 감정의 이면

SEETHESUN 해보리 2008. 9. 1. 18:05
출처 。Via Mondacce | 미루나무
원문 http://blog.naver.com/asartemis/54028083
 

2000 베이징올림픽에서 '혐한(嫌韓)증'이 기승을 부리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한때 '한류(韓流)' 열풍의 진원지로 꼽혔던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올림픽 축제에서 한국이 이런 '대접'을 받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그 충격은 더욱 크다.


 종목별로 한국과 중국이 맞붙는 자리에서 중국 관중들이 자국팀을 응원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지만, 문제는 중국이 아닌 3국과 한국이 대결하는 곳에서도 중국인들의 응원은 언제나 한국의 반대쪽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선수가 사대에 서기만 하면 페트병을 두드리고 야유를 보내곤 했던 지난 14일 양궁 여자 개인전에서는 난공불락의 한국에 대한 시기가 맞물려 있기에 그렇다 쳐도 중국의 결과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종목에서 나오는 '반한(反韓) 응원'은 지극히 감정적이라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한국 올림픽축구팀의 한 관계자는 "현지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 내 '반한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말을 한다. 한국을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반응은 차갑다"고 전했다.


 사례를 몇개 들어보면 우선 남자 축구에서 한국은 한번도 중국 팬들의 응원을 받지 못했다. 응원은 커녕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중국 관중은 언제나 카메룬 이탈리아 온두라스 등 한국 상대팀에게 '찌아요우(加油·힘내라)'라는 함성을 보냈다. 응원구호 '대~한민국'의 반대어는 '찌아요우'처럼 비쳐졌다.


 펜싱 여자 플뢰레 결승에서 태극검객 남현희는 이탈리아의 베찰리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약자보다는 강자를 응원했다. 골리앗에 맞선 이웃의 동양인에게 보내는 박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선수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만으로 지지를 보냈다.


 한국과 미국의 야구 첫 경기에서 미국측 응원은 중국인까지 가세해 그 기세가 대단했다. '메이궈 찌아요우(미국, 힘내라)'라는 구호는 미·중 합작품이었다. 특히 이 응원은 처음에 몇몇 중국인이 외치자 미국 관중이 따라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미국을 응원한 주류는 중국인들이었다.


 지난 5월 한·중 양국은 전면협력동반자관계를 뛰어넘어 전략협력동반자 관계로 외교적 지위를 격상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지향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외교적 관계의 나아감과는 별도로 중국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랭하기만 하다. 마치 역사적 구원관계를 형성한 일본, 혹은 세계 패권 다툼의 라이벌인 미국을 겨냥한 감정이 그대로 한국에 옮겨온 듯한 느낌이다. 이를 두고 '혐한'(嫌韓)의 모습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웃한 나라와 동반자 관계까지 맺었던 한국에 중국인들은 왜 싸늘해졌나.

 한국 축구 대표팀과의 대결에서 40년간 무승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중국은 '공한증(恐韓症)'을 꺼내며 과거 조공을 상납하던 변방 소국에 한번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분하게 생각해 왔다. 역사적으로 '신하의 나라'로 평가하는 한국이 중국을 넘어섰다는 것에 대한 질투가 그 곳에 숨어 있다.

 

 최근에는 올림픽과 관련한 사건사고가 중국인들의 비위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티베트 사태가 불거지며 국내에서 성화봉송 반대 움직임이 일었고, 올림픽 개막식 내용이 국내 한 방송사에 의해 미리 공개된 것도 한 몫 했다.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ㅡ

 

 

언젠가 터질 일이 드디어 터졌다.

 

지금 중국은 '자기정체성 수립의 사춘기'와도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너무 빨리 비대해진 몸집, 자격을 갖추기도 전에 받기 시작한 대우, 후진성과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의식 수준... 한 마디로 지금 중국이 앓고 있는 것은 부모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하고자 하지만 아직은 부모에게 경제적, 정신적 의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청소년의 울분과 열병,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국의 한국 비하 관념은 최근 1~2년 사이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수교가 이루어질 무렵인 10~20년 전에도 중국은 공공연히 '중국과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하면서 은근히 중국이 형'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길 좋아했다.(<중국이 보인다>(중국학 연구회, 일빛, 1998)에는 이러한 중국우월주의 행태가 다양하게 담겨 있다.) 그래도 아직은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고, 근대 시기에 일본으로부터 받은 피해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던 터라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을 더 앞세울 이유가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가 사라졌다. 일본에서 친중파에 속하는 후쿠다 내각이 들어서면서  일본과의 관계가 가까워진데다 개혁개방 이후 한 세대 가까운 시간(30년)이 흐르면서 일본에 대한 기억은 상대화된 반면, '지금 당장' 밀려들어오는 문화적 파도는 바로 옆 나라 한국에서 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강릉의 단오제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면서 중국이 '자기네 문화를 뺏어간다'고 반응한 사건이나 최근의 SBS 개막식 리허설 촬영 등을 이유로 우리나라가 문제를 야기한 측면이 있다고 하나, 이것은 침소봉대에 가깝다. 겨우 이런 사소한 사건들 때문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혐한 행동들을 장장 2~3년간에 걸쳐 주구장창 이어갈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의 비상식적 난동에는 역사적, 정치적, 심리적으로 보다 뿌리 깊은 이유가 존재한다.

 

나는 지금 중국의 혐한이 지난 90년대에 우리나라에 일었던 '일본은 있다/없다' 류의 논쟁과 비슷하다고 본다. 당시 우리나라는 정치적 민주화 이후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린 시기로, 그 풍요란 요약하면 경제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문화적 개화(開花)였다. 그런데 정치적 해방이나 경제적 성장과 달리 문화는 지체 현상을 보였다. 당장 우리의 현실을 반영하고 열망을 충족시켜 줄 만한 문화를 자생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TV 오락 프로그램들이 일본 오락 프로그램의 컨셉을 베껴 만들어졌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거리에는 X-JAPAN과 같은 일본 록 그룹의 음반이 불법으로 수십 만 장이나 팔렸다.  어린이들이 보는 TV 만화영화는 90~100% 가까이 일본의 것이었고, 학생들이 쓰는 문구도 디자인과 품질이 좋은 것들은 대부분 일제였으며,  어른들은 품질 좋은 일제 전자제품에 매료되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장장 36년간 유린한 나라가 아닌가. 제대로 사죄조차 한 적 없는 그 나라의 문화에 애어른 할 것 없이 '우리 정신이 팔려 있다니'! 그것은 스스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처에 대한 환멸'은 당시 십대였던 내 또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즈음 나온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가 사회 전반의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달래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 역할을 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학생들도 여름방학 독후감 숙제로 '<일본은 없다>를 읽고'와 같은 숙제를 주구장창 작성했다. 내 기억으로 여름방학 독후감 숙제로 <일본은 없다>에 대해 쓴 학생이 한 반 47명 가운데 거의 35명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나쁜 일은 했는데, 애들은 일본 만화, 학생들은 일본 학용품, 어른들은 일본 전자제품에 미쳐 있다'는 식의 반성으로 시작하여 '일본을 알아서 일본을 이겨야 한다'류의 결론으로 끝나는, 무슨 대자보 선전물 같은 독후감들이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열등감은 그대로인데 그 열등감을 보기 좋게 씻을 수 있을 수 있는 역량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저것들을 실컷 깔보아 주어도 모자랄 마당에 이 나라 사람들은 죄다 만화, 음악, 전자제품 등 일본 것들에게 '정신적 의존'을 하고 있으니 정말 환장할 일이다, 이기자 이기자 일본!  그러나 이러한 일본론이 잠잠해진 것은 90년대 말 소위 '한류'라고 하는 문화 현상이 일면서였다. 단 한면도 국제 사회에서 '문화'를 들이밀 수 없었던 우리나라가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나마 '졸지에', 그러니까 '어쩌다가' 문화적으로 주도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아직도 민족적 열등감이 다 가셨다고 하기 어려운 이 시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격에 젖었는지, 아직 일본 문화의 시장점유율에 비하면1/5, 1/10도 안 되는 한류의 성장을 놓고 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전문가들이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해서도 얼마간이나마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했고, 미국에 대해서도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 추모식 등을 거치며 그동안의 구속감을 떨쳤다(그러고 보면 미선,효순이를 위한 촛불 추모식은 사실 우리 자신을 위한, 우리 자신의 역사를 애도하는 추모식이었던 것 같다). 미국과 일본이라고 하는, 한국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두 강대국을 나름대로 '극복'하면서 한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중국은, 한국이 지난 20여 년간 거쳐온 이런 '문화적 정체성의 독립'을 이제 막 시작하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나오는 한국의 드라마를 보고, 동방신기 송혜교 같은 한국 연예인들에게 열광하고, 한국의 패션을 따라하면서 그들은 선망과 동시에 굴욕을 누적해 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 만화를 보고 일본 학용품을 쓰며 일제 전자제품에 매료되면서 느낀 '정신적 의존'과 다르지 않다. '한국은 역사 속에서 줄곧 중국 '아래'였는데, 왜 지금 우리는 '아랫 것들'의 문화에 의존해 있지? 왜 우리는 '아랫 것들'의 문화를 선망하지? 왜 저 '아랫 것들'의 문화는 이렇게 우수한 거야?' 같은 심리. 우리가 일본의 경제적, 국제적 위상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뼛속까지 일본을 경멸하고 무시했던 그대로, 중국은 바로 우리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을 한국 것이라고 한다더라, 공자까지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루머들은 언젠가 루머로 명명백백히 밝혀질 일이고, 그 때 가서는 그들도 얼마간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를 어떻게 그 많은 중국인들이 사실로 믿고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들이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인들이 저렇게까지 말도 안 되는 루머를 기어이 믿고 게거품 무는 이유는, 한국 문화의 성장에서 받은 자존심의 상처가 크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중국은 불교와 실크로드 교역 외에 이렇다 할 외국 문명의 유입을 경험한 적이 없다. 언제나 중국에서 무언가가 자생하고 확대되었지, 그 역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변방 소국으로만 여겨온 한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내면을 잠식해 가는 것에 대해 극도의 수치심을 느낀 듯하다. 아직 중국이 이룩하지 못한 거의 모든 성취(정치적 민주화, 문화적 선진화, 시민의식의 성장까지)를 한국은 다 이루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4대 발명품까지 한국 것이라고 우긴다'는 피 토할 거짓말 속에는, '우리가 이루었어야 할 문화적 성취와 우리가 누리고 있어야 할 문화적 자긍심을 오히려 한국이 다 누리고 있다'는 박탈감이 담겨 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땅도 좁고 인구도 적고 문명사적 지위도 대단하지 않은 한국이 왜 중국이 못한 일들을 다 해낸 것인지.  저런 한국도 해내는 일을 왜 중국은 하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하고 억울해서 미쳐 죽고 싶은 것이다.

 

사실 중국에는 한국 문화 이전에 일본 문화가 유입된 바 있다. 그런데  일본 문화는 민족 정서상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일본 문화가 유행한 것도 청소년 같은 젊은 계층 일부에게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반면에 한국의 문화는 민족적 거부감이 없었던데다 유교적 동질감까지 더해져, 거의 모든 세대에게 친근하게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일본 문화는 태생적 '거부감'으로 인해 중국인들의 내면을 잠식할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 문화는 그 반대의 이유로 중국인들에게 선망과 질시, 수치와 열등감을 동시에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일본에 대해서보다 더 큰 저항과 폭력에 직면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내면에 너무 깊이 파고든 것이다. 그들의 뒤틀린 자존심의 화풀이 대상이 될 만큼.

 

우리나라에 <일본은 없다>와 같은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그 때, 일본에서는 그런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의존과 선망' 한가운데 있어서 일본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에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 지금 중국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딱하게 보고 있는지, 얼마나 한심하게 보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 젊은이들의 혐한 행동에는 이와는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우리는 전세계가 풍요를 구가하던 90년대에 '대일 의존의 굴욕'을 경험했지만, 중국은 전세계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신자유쥬의의 조류 속에서, 그것도 공산당이라는 일당 독재 하에서 이와 같은 '문화적 굴욕'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의 혐한 감정에는 (신화적 의미에서) '권위 있는 아버지'인 공산당 정부에 대한 불만도 숨어 있다. 6.4 천안문 사태 때 너무나 막강한 '아버지의 권위'를 체험한 중국인들은 '광주 학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일궈낸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 처지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 공산당 정부는 우리의 유신 정부와 다르다. '공산당이라는 아버지에 대들었다가는 거세당할지도(혹은 죽을지도) 모른다' 공포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에 불만이 있어도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직접 표출하지 못한다. 누적된 분노는 폭력으로 변하고, 아버지에게로 향할 수 없는 폭력은 약자에게 전가된다. 현재 중국 민중이 선택한 '만만한 약자'는 바로 자신들에게 문화적 의존과 선망, 굴욕, 열등감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는 한국이다. (우리는 졸지에 중국 내 유대인 처지가 된 것이다.)

 

사실 몇 년 전 중국에서 대대적인 항일 시위가 발생했을 때, 그 가운데 상당 부분 반정부 시위적 성격도 있었다는 것은 지금도 중국 관련 전문가들에게는 공공연한 상식이다. 그 만큼 중국에서 표출되는 모든 '격렬함' 뒤에는 사실상 중국 공산당에게로 향하는  '반정부적 분노'가 숨어 있다. 이 분노가 양지에 드러나 정말로 '당'을 향해 직접 표출되기까지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또 다른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전세계적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젊은 세대의 빈곤화다.

이 부분은 많은 언론들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듯하다.

 

사실 지금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높은 진입 장벽' 앞에서의 좌절과 그에 따른 빈곤으로 분노해 있다. 우리나라의 <88만원 세대>는 특별히 고분고분한 케이스로, 너무 깊이 내면화한 승자독식 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신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유순한 빈곤 세대다. 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하고 사회적 성공을 도외시하는 <하류 지향>에 접어드는가 하면, 아예 사회와의 신체적, 경제적 교류를 일체 포기하는 <히키고모리>도 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주소조차 가질 수 없는' 일본의 비정규직 젊은이 가운데 몇 명이 거리에서 '묻지마 살인'을 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공감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을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유럽의 젊은이들도 학업을 마치고 제대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천 유로 세대'로 넘실거리고, 이보다 상황이 절망적인 러시아에서는 가운데에는 나치를 숭배하며 반유대주의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스킨헤드'의 등장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실 지금 전세계는 '분노청년(憤靑)'으로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젊은이들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그들도 우리나라 못지 않은 입시 억압과 공교육 파탄을 경험했고,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우리나라 20대 인구의 열 배가 넘는다.  전세계 젊은이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빈곤화'의 물결에서 그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대들고 있는가. 일본에서와 같은 묻지마 살인도, 러시아에서와 같은 스킨헤드도 없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는 분청(憤靑)이 있다. 지금 과거 항일 시위와 현재의 혐한 물결을 주도하고 있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중화민족주의'가 자신들이 숭배하는 나치당이고, '한국인'이 바로 그들의 '반유대주의' 타깃이다. 지금 올림픽 경기장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한 폭력은 중국판 '묻지 마 살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 이념이 퇴조해 가는 시점에 이념적 공백을 대체할 다른 사상이 보이지 않고, 공산당 독재 치하의 중국은 사상적 통제마저 심해 자율적으로 그 공백을 메울 수도 없다. 역시 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장기불황을 겪으며 이념적 공백과 맞닥뜨린 일본이 '우경화'라고 하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듯, 지금 중국도 이런 사상적 공백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일본의 우경화 못지않게 위험한 '대중화주의'의 오만에 스스로 중독되어가리라는 예측을 거둘 수 없다.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너무나 고분고분한 한국의 88만원 세대와, 정신적 구심점 없이 방황하는 일본의 젊은이들, '거세 위협'에 시달리느라 정부에 대항할 수도 없는 중국의 분청.  사실 문제는 지금 당장 올림픽 경기장 주위에서 일어나는 혐한 하나만이 아닐 수도 있다.

 

 

개혁개방 이후 30년 동안 눈부신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고, 그에 못지 않은 국제적 지위의 상승을 누리게 된 그들. 그러나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문화적 개화가 뒤처지면서 문화적 자생력도, 문화적 정체적도 확립하지 못한 채 뒤틀린 의존과 선망과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 한자녀 가정에서 태어나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자라서는 전세계적인 빈곤의 물결이라는 '끔찍한 현실'에도 합류하게 된 중국 젊은이들.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는 사실 그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90년대를 우리가 알아서 극복했듯이.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중국이 가하는 비상식적 폭력에 단호히 대처하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돌파구를 열어보이는 노력일 것이다.